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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의 한국 위상과 탈레반에 대하여

by Daniel Notes 2021.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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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BBC 뉴스

 

아프가니스탄 현 상황 및 한국 위상 : 이희수 교수 인터뷰

 

8월 24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대하여 이희수 성공회대 석좌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현재 탈레반은 차기 정부 구성 작업을 착수하고 있어서 나름 안정적으로 정권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은 부족 국가로 이루어져 있어서 차기 정부에 탈레반 외 다른 부족 세력이 정부의 일부 자리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고 이 요구가 들어주지 않으면 내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아프가니스탄은 특정 세력만으로 정부 구성을 한 적이 없었다. 탈레반은 전후 복구에 있어서 다른 나라와 손을 잡아야 하는데 이 점에 있어서 한국은 유리한 위치에 있다. 아프가니스탄 젊은 세대에게는 BTS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며 625 전쟁 이후 선진국으로 발전한 한국을 우러러보고 있다. 이에 탈레반은 종교와 문화가 틀린 한국이지만 아프가니스탄 젊은 세대들이 좋아하는 한국과 손을 잡게 되면 젊은 세대들이 탈레반의 추진 정책에 호감을 갖게 될 것이므로 우리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이 교수는 전했다.

 

탈레반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남부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파슈툰족에 바탕을 부족단체에서 출발한 반군 테러조직으로 학생을 뜻한다. 탈레반은 1990년대 중반 활동을 시작, 지도자 무하마드 오마르를 중심으로 결속해 1997 정권을 장악했으며 이후 2001 미국의 공격으로 축출되기까지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했다. 탈레반 축출 후 20년동안 통치했던 미군이 철수를 결정하자마자 2021년 8월 현재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현대사 발자취

 

1979년 ~ 1997년

 

아프가니스탄은 1979 소련군의 침공을 계기로 소련의 점령 하에 들어갔으며 이슬람 조직들을 중심으로 미국 등의 지원을 받은 저항세력들이 10 이상 소련 항쟁을 벌였다. 1989 소련은 아프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아프간에선 1990년대 들어서면서 정전불안이 계속됐고 정부의 공백을 틈타 군벌들이 내전을 벌였다.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냉혹한 군벌들은 카불 시내를 폭격해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같은 혼란 속에서 등장한 탈레반은 엄격한 이슬람 규율로 무장하고 전국을 빠른 속도로 장악해갔다. 카불의 무력한 기득권층과 북부 양귀비 재배 지역에서 아편 매매 수입으로 횡포를 부리던 이른바 마약 군벌들과 경합하다가 1997년에는 정권을 장악했다. 군벌 경쟁자들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지만(군벌들 일부는 북부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아프간 공격 미군 쪽에 협력했다.), 정국은 다소 안정되는 듯했다.

 

1997년 ~ 2021년

 

탈레반이 집권할 당시인 1997년만 해도 미국은 소련의 영향력에서 아프간을 빼낸다는 쪽에 무게를 경계를 하지 않았었다. 실제 당시 탈레반 정권은 민주적 투표로 집권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통성이 있는 정권으로 인정을 받았다. 국제사회의 공인은 몇몇 나라에서 받는 그쳤으나 아프간 지지율은 60% 이상이라는 조사결과가 외신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뒤에는 탈레반의 극단적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이 도마에 올랐다. 부정부패를 청산하는 숙청작업에 그치지 않고 언론을 탄압하고 거의 대부분의 방송국을 폐쇄했으며 서방 문화를 전파하는 언론 활동을 엄금시키고 종교 자유를 억압했다. 특히 국제사회를 경악하게 것은 여성의 교육을 전면 엄금시키고 모든 여성들을 집안에 감금시킨 탈레반의 조치였다. 힐러리 클린턴 당시 대통령 부인 등이 나서서 국제무대에서 탈레반을 비판했던 원인은 바로 탈레반의 여성탄압 정책이었다. 탈레반은 부르카(얼굴과 온몸을 가리는 검은 ) 착용을 의무화한 것은 물론,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전면 금지시키고 심지어 밖에 여성이 혼자서, 혹은 여성들끼리 외출하는 것도 막았다. 남성이 특정 여성을 간통했다고 지목하기만 하면 여성을 유죄판결에 돌로 때려죽이게 하는 끔찍한 사형제도도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은 예로부터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았고 사회활동도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보다 훨씬 활발하게 벌였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여성들에 대한 이같은 탄압이 가져온 충격은 더욱 컸다.

 

2001 3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바미얀 석불을 폭파시켜 아프가니스탄과 세계를 경악에 빠뜨렸고 탈레반의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는 같은 이슬람주의를 내세운 이란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미국은 1993 소말리아, 수단에서 미군을 공격한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라덴이 아프간에 오래전부터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1996년부터 탈레반 정권의 보호 아래 아프간에 숨어있다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오마르와 라덴은 소련 전쟁 당시 함께 저항 운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2001 9 11 뉴욕 등지에서 테러 대참사가 벌어지자 미국은 곧바로 알카에다와 오사마 빈라덴을 범인으로 지목했으며, 11 오사마 빈라덴을 색출한다며 아프간 전쟁을 시작했다. B2 스텔스기, 무인정찰기 프레데터 등을 총동원한 미국의 막강한 화력 앞에 탈레반은 변변한 저항도 무릎을 꿇었다. 미국은 전쟁에서 무력한 아프간을 상대로 재래식 폭탄으로서는 사상 최악의 폭탄이라는 MOAB 폭탄까지 사용하려 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고 철회했으나, 집속탄을 마구 뿌려 아프간의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피해를 입힌 것으로 알려졌다.

 

탈레반 정권은 축출됐으며 무하마르 오마르는 동부 파키스탄 접경지대로 피신했다. 그러나 미국의 침공 이래 5년이 지나도록 미군은 빈라덴을 잡지 못했으며 오마르는 2006년말까지도 건재한 오히려 남부에서 탈레반을 재규합하고 있었다. 미국이 빈라덴을 '적법한 절차' 아닌 전쟁으로 죽이려 하고 무고한 아프간인들까지 살상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이 많이 제기됐다. 특히 타국의 집권세력인 탈레반 정권을 무력으로 무너뜨린 것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미국은 탈레반을 축출하고 반소련 독립항쟁 지도자의 아들로 신망있는 친미파 지도자였던 하미드 카르자이를 아프간 대통령으로 내세웠다. 카르자이는 집안의 명망과 미국의 지원 등에 힘입어 과도정부를 이끌었으며, 이후 실시된 선거에서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카르자이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전후 관리 책임을 맡았으나, 아프간 고질적인 정치적 분열과 남부의 계속되는 전투 때문에 정국을 효과적으로 장악하여 난국을 해결하지 못했다. 미국은 아프간을 공격하고 치안유지군(ISAF)이라는 이름으로 다국적군까지 불러들였으나, 탈레반을 완전 제거하는 실패했다. 탈레반이 극단주의 때문에 안팎의 비판을 받긴 했으나, 여전히 아프간인들 상당수, 특히 남부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지역에서는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새로 집권한 바이든 대통령은 모든 미군 병력을 철수시키겠다고 밝혔고 지난 5월 3일 미군 철수가 시작되었다. 미군 철수 시작한 지 3개월만에 지난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내무부는 탈레반에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아슈라프 가니 전 대통령은 대통령궁을 빠져 나와 현재 아랍에미리트에 체류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 출처 : 위키백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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