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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 주다 (정보 소개)/인물을 알리다

월말 김어준, 뉴스공장, 다스뵈이다 : 김어준에 대해 알려주마

by Daniel Notes 2021.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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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아침 출근길에서 교통정보만 하는 줄 알았던 듣도 보도 못한 교통방송 TBS에 아침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몇 년째 청취율을 1위를 기록하고 영향력 있는 언론인 순위에서도 몇 년째 손석희에 이어 2위를 기록하는 자. 매주 수요일에는 충정로에 있는 벙커원에서 시사 토크쇼 <다스뵈이다>를 만들어 매주 금요일 밤 10시에 유튜브를 통해 방영하는 자. <다스 뵈이다>를 만드는 딴지 방송국 구독자 수는 80만이 넘고 TBS 유튜브 구독자수는 백만 명이 넘는다.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이에게는 독고다이로 기득권에게 맞서는 장비로 통하고 국민의힘 지지자에게는 음모론을 외치는 혹세무민의 극치를 달리는 자. 기존 언론인들에게는, 심지어 나름 진보 지향의 언론인에게도 정통 언론인도 아닌 음모론을 펼치는 아마추어로 평가절하를 받는 자. 그럼에도 많은 국민들은 주중 아침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통해 김어준의 생각을 듣고 금요일에는 유튜브를 통해 <김어준의 다스뵈이다>를 본다. 기존 언론에서는 들을 수 없거나 다른 시점의 시사 정보를 <뉴스공장>에서 다른 이의 인터뷰를 통해 습득하고 <다스뵈이다>를 통해 고급 정보뿐만 아니라 B급 재미를 얻는다. 출중한 인터뷰 실력으로 다양한 분들을 모시고 철학, 과학, 고전, 음악 등 다양한 문화 정보를 제공하는 <월말 김어준>을 지난 1월 말부터 팟빵을 통해 유료로 제공하고 있다. 극우 수구 꼴통들에게는 각종 욕을 무수히 많이 먹고 있지만 그는 언제나 외친다. "시바! 쫄지마! 크하하하하!" 나는 그를 자유주의자 '장비'라 명한다.

학창 시절

조선일보보다 더 보수적인 아버지와 남자 대장군처럼 한 카리스마 하는 어머니 사이에 자식들을 방목해서 키우는 교육(?) 분위기에서 자랐다. 1968년 12월 4일생으로 경상남도 진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들의 삶에 완력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PC통신비가 많이 나와도 유리창을 깨도 모든 일의 책임은 그 일을 한 김어준이 책임을 지게 했다. 그러한 부모의 대응이 김어준에게는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해도 된다는 철학을 갖게 만들었다. 김어준은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해 서울대를 목표했으나 재수를 했음에도 실패하자 화장실을 문을 잠그고 서러운 감정들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화장실 문을 도끼로 부쉈다. "두 번 낙방한 게 뭔 대수냐, 그게 실패한 거냐? 그거에 힘이 빠져서 숨은 곳이 화장실이라니, 쯧쯧. 닥치고 나와서 밥 먹어!" 하지만 김어준은 삼수를 했음에도 서울대를 실패하고 홍익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군대를 갔다 왔고 자신을 돌아볼 요량으로 해외여행을 떠나서 깨달았다. 정통의 코스에서 벗어나야 자유로워지고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해서 만족하는 절대적 자신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회사 생활 

대학 졸업 후 아버지의 소망과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으로 그럴듯한 회사, 포스코에 들어갔다. 하지만 8개월 만에 직장 상사였던 모 이사가 새벽 4시까지 이어진 회식에서 다음날 아침 7시 출근하라는 엄명과 더불어 본인이 이사가 된 것은 아무리 새벽까지 술을 먹고 들어와도 아침 7시에 일하는 자세 때문이라는 얄팍한 자부심에 실망하여 짐을 꾸렸고 바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집에서는 해외 출장인 줄 알았다.  

배낭 여행

김어준은 퇴사 후 약 50개국을 여행 다녔다. 배낭여행을 통해 김어준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 어떤 커플이 6개월 동안 사하라 사막을 도보로 여행했다는 정보를 잡지를 통해 읽고 사하라 사막을 갔는데 거기서 사하라 사막이 그냥 모래뿐이라는 것을 알고 1시간 만에  다른 곳으로 갔다.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초대 수반을 만나러 이스라엘에 아라파트 집 앞까지 갔다. 하지만 자신이 아라파트에게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담벼락에서 사진 찍고 돌아왔다. 그는 유태인을 똑똑하고 선이라 생각했고 아랍인들은 테러리스트이자 나쁜 놈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랍을 여행하면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랍 버스에서 올라와 검문을 하는 이스라엘 군인을 보며 일본인 순사라고 느꼈고 팔레스타인의 폭탄 투척을 보고 우리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과 다름없음을 알게 되었다. 배낭여행에서 관광지 백인 삐끼들이 동양인들을 인종 차별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백인 식당 웨이터들에게도 과잉 깍듯한 동양인들이 필리핀 마닐라 식당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배낭여행은 김어준의 인생에서 그를 만든 전부였다.

벤처기업 <플래넷>  창업

포스코를 그만두고 배낭여행으로 다진 경험을 통해 벤처기업 '플래넷'을 창업했다. 플래넷의 주요 프로그램은 신입사원에게 요구되는 모험과 도전정신을 키워주면서 동시에 배낭여행까지 즐길 수 있도록 기업의 해외연수와 배낭여행을 접목시켰다. 열 평 오피스텔 사무실에 컴퓨터 한 대와 여직원 한 명으로 시작한 회사는 직원이 20명으로 늘어날 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닥치자 기업들은 문을 닫았고 직원들의 해외연수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이 되자 결국 '플래넷'은 문을 닫았다.  

<딴지일보> 창간

1998년 7월 4일 <딴지일보>를 창간했다. 조선일보 인터넷 홈페이지를 패러디한 <딴지일보>는 창간 후 하루 10회 클릭에 못 미쳤다. 이때부터 딴지일보 총수가 된 김어준은 기사도 본인이 쓰고 댓글도 본인이 달았다. <딴지일보>는 철저히 조선일보를 비판하고 희화화했다. 정통 기사 작성 방식과는 다른 문법에 육두문자와 음란한 1차원적인 단어를 남발했지만 국제적 안목만큼은 김어준만의 힘이 있었다. 조선일보가 외국 삼류 선정지 <위클리 월드 뉴스>의 기사를 인용하자 어김없이 조선일보를 희화화했으며  조선일보 주필 김대중이 외국의 기사를 오역을 넘어 원문 왜곡을 하자 적나라하게 꼬집었다. 현재 김어준이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타언론과는 틀리게 외국 언론 기사를 제대로 설명해주고 타언론의 외신 왜곡 뉴스를 정확하게 비판할 수 있는 힘은 이때부터 갖추게 된 것이다. 김어준은 조선일보를 '좃선'으로 표기했고 한 때 극우 잡지 한국논단을 '한국농담'으로 표기한 것도 "의미 전달이 되는 선에서 표현하되 직설을 삼가하면 좋겠다."는 패러디에 대한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딴지일보>는 허용 가능한 선에서의 권력자 풍자와 극우 보수 매체에 대한 희화화로 인기를 끌게 되었다. <딴지일보>는 기성 언론이 끼지 않은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초 인터넷신문이었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를 내걸고 2000년 창간한 오마이뉴스보다 앞선 시민기자 시스템이었다. 거짓 뉴스를 내보내면서도 사과도 별로 하지 않고 세계에서 몇 년째 언론 신뢰도에서 꼴찌를 지키고 있는 한국 언론이 음모론자 거짓말쟁이라고 김어준을 비판하는 것도 아마 김어준의 태생이 B급 매체  <딴지일보> 창간으로 시작된 점이 크다 할 것이다. 기존 언론의 언론인들이 김어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다.        

지상파 진출

2004년 5월 10일 CBS 표준 FM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김어준의 저공비행> 프로그램 진행을 시작했다. 김어준의 인생 처음으로 지상파 라디오 방송 진행자가 된 것이다. 김어준의 성격대로 정치와 성에 대하여 아슬아슬하게 진행을 했다. 방송위원회에서 시청자에 대한 사과를 명령받기도 하였다. 박근혜 관련 논평을 했다가 <김어준의 저공비행>은 문을 닫았고 2005년 3월 7일부터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이라는 CBS 간판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로 영전했으나 그해 12월 CBS에서 하차한다. 결국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로서 품위와 정치에 대한 균형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를 자른 CBS 윤병대 당시 편성 국장의 입장에 따르면 당시 한나라당에 대해 상당한 조롱과 비아냥거림을 취한 김어준은 진행자로서 적격이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이후 김어준은 2006년 5월 1일부터 2008년 3월 28일까지 SBS FM에서 <김어준의 뉴스N조이>를 진행했고 2010년 10월부터 2011년 9월까지 MBC FM <두시의 데이트 윤도현입니다>의 '연애와 국제정치' 코너에서 게스트로 참여했으며 2011년 5월 9일부터 2011년 10월 21일까지 MBC FM <김어준의 색다른 상담소>를 진행했다. 2009년 6월 23일부터 2012년 12월 12일까지 한겨레 TV에서 인터넷 방송 <김어준의 뉴욕타임스>를 진행했는데 이 콘셉이 현 딴지 방송국의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로 이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팟캐스트 <나꼼수>    

한겨레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 <김어준의 뉴욕타임스>에서 이명박의 심리를 주로 이야기했던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가 누리꾼의 큰 호응을 얻었으나 출연을 중단하면서 김용민이 '시사 장악퀴즈'로 투입되었고 이명박 저격수로 활약한 정봉주 전 국회의원이 '정봉주의 PSI' 코너에 참여하면서 김어준, 정봉주, 김용민이 찰떡궁합이 시작되었다. 인터넷 방송이었지만 지상파에서 누릴 수 없는 표현의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문제가 된 것은 한겨레 내부에서 발생했다. 아무리 인터넷 방송이라 하지만 한겨레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인만큼 일정한 격식이 필요했고 한겨레의 고민은 공매체로서 타당했다. 이러한 상황이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의 태동 배경이 되었다. 

2011년 1월부터 김어준, 정봉주, 김용민은 매주 여의도 낙원식당에 만나 토크쇼 구조로 새 프로그램을 구상했고 기술 제작 실무를 맡은 김용민의 제안으로 오디오 팟캐스트 형식으로 시작하였다. 오디오 팟캐스트 형식을 취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되기 시기였고 보다 많은 접근을 도모하려면 파일 크기가 최소화돼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팟캐스트 <나꼼수>는 딴지일보에서 제작하는 대한민국 팟캐스트로 2011년 4월 27일 첫 방송을 탔다. 방송 이름은 MBC 예능 프로그램 <나는 가수가>에서 따왔다. '국내 유일의 가카 헌정 방송'을 표방했는데 여기서 '가카'는 각하를 의미하는 말이며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인 이명박 전 대통령(임기 2008년 2월 25일~2013년 2월 24일)을 뜻한다. 처음에는 김어준, 정봉주, 김용민으로 시작했다가 주진우 기자가 추가로 참여했다. 팩트를 정확하게 얘기할 수 있는 기자의 역할이 필요한 것이었다. 나꼼수는 일반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정치의 이면을 다뤘고 그 당시 이슈가 되는 정치 상황을 논평했다. 네티즌들의 전폭적인 인기를 끌었고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팟캐스트 1위에 올랐다. '나꼼수' 현상이라는 단어까지 유행할 정도였다.  특히 오세훈 서울시장의 사퇴로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박원순 당선에서 보여준 나꼼수의 역할은 미국 뉴욕타임스 11월 2일판 국제판에서도 언급되었다. "나꼼수의 대중성은 지난달 26일 서울시장 선거에서 20대부터 40대에 이르는 유권자 다수가 범야권 박원순 후보에 표를 던진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나꼼수의 인기로 나꼼수를 향한 정권의 압박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정봉주가 나꼼수 활동 중 이명박 전 대통령의 관련 의혹을 제기했다가 허위 사실 및 과장된 사실이라는 혐의가 인정되어 선거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선고를 받았고 2022년까지 피선거권이 상실되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의혹은 최근 사실로 밝혀졌고 문재인이 대통령이 2017년 12월 29일 복권하면서 피선거권이 회복되었다.)  김어준과 주진우는 '박지만 씨 오촌 피살사건'에 대한 의혹 제기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아들 박지만 씨에 대한 허위 사실을 공표해 명에를 훼손한 재판에 피소되었다.(2012년 기소되었고 1심, 2심 무죄에 이어 2017년 최종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18대 대선 하루 전인 2012년 12월 18일 마지막 회로 종영하였다. 나꼼수 멤버들은 18대 대통령으로 문재인이 될 줄 알았는데 박근혜가 당선되는 바람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는 특별한 활동을 한 적이 없다. 18대 대선 직후 김어준은 해외여행을 잠시 동안 갔다 왔고 앞서 언급한 명예훼손 재판 1심이 2013년 10월 24일에 있었고 2심이 2015년 1월 16일 있었는데 둘 다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지상파 TV

2018년 1월 18일부터 2018년 8월 2일까지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를 진행하였다. 

현재 

2016년 9월 26일부터 현재까지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진행하고 있다. 2018년 2월 한국리서치 조사 결과 라디오 청취율 시사부문 1위, 종합 공동 1위(11.6%)에 올랐고 같은 해 4월에 실시한 2라운드 조사 결과 단독 1위(12.8%)에 올랐다. 최근 발표한 2021년도 1라운드 아디오 청취율 조사에서도 11.8%로 단독 1위를 기록했다. 2017년 11월 24일부터 현재까지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역시 진행하고 있다.

정리하며

무려 10년 전인 2011년 11월에 나온 <주간 조선>에서 딴지일보 부편집장인 '필독'이 김어준에 대한 평이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김어준은 좌파인가? 아니다.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좌파로 분류될 뿐이다. 그처럼 순수한 마초는 좌파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순도 높은 자유주의자다. 김어준은 자유롭게 욕망을 추구할 자신의 권리와 타인의 권리가 서로 피해를 입히지 않고 공존 하는 상태를 '명랑 사회'라 명명한다. 딴지일보의 창간 모토는 '명랑사회 창달'이다. 김어준은 자신이 망사스타킹을 탐할 권리와 성적 소수자가가 동성의 육체를 욕망할 권리를 동등하게 해석한다. 그는 자타공인의 마초지만 동성애를 비난하는 마초는 비겁하다고 힐난한다."

 

내 생각에 김어준과 유시민은 똑같이 자유주의자다. 김어준은 자유주의자 '장비'이며 유시민은 자유주의자 '제갈량'이다. 과거 조국 사태로 김어준 홀로 세상을 향해 외칠 때 유시민 작가가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나와서 조국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안한다고 하다가 왜 다시 정치 비평을 하냐는 김어준의 질문에 유시민은 "김어준 총수가 장판교에서 수많은 적들과 혼자 싸운 장비처럼 고생하고 있어서 나라도 좀 도우려고 나왔다"라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다. 민주당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180석이나 얻었지만 선거 막판 민주세력이 180석 정도 얻을 것으로 희망한다는 말로 곤욕을 치룬 유시민이 완전히 정치 비평에서 손을 뗐다. 이후 민주당은 서울, 부산시장에서 완패했으며 내년 대선이 요지경이다. 요즈음 김어준은 유시민을 책 소개를 핑계로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최근 초대했고 그 방송에서 유시민을 정치로 다시 부르기 위해 무척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전에 문재인 대통령을 정치에 참여시키기 위해 그렇게 부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유시민 역시 태생이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이다.

 

# 참고 : <은하계 최초 잡놈 김어준 평전>(김용민, 인터하우스, 2016), 나무위키, 위키백과 외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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