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친구들한테 한 말씀 해 달라. 노인세대를 어떻게 봐달라고….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 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2014년 1월 4일 채현국 선생님이 한겨레와의 인터뷰중의 한 장면이다. 자신과 같은 노인 세대를 욕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는 젊은이들을 향한 일갈이다. 일제시대와 6.25 전쟁, 1950~70년대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한 세대들에게는 억울할 일이 분명하지만 채현국 선생님은 그들의 공은 인정하되 옛날의 생각에만 멈쳐져 있는 노인들을 보며 젊은이들이 단연코 따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인터뷰가 화제가 되어 채현국 선생님이 '시대의 어른'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한겨레와의 인터뷰는 아래 링크를 따라 보기를 바란다.
https://news.v.daum.net/v/20140104094006139
채현국 선생님은 1935년 사업가 채기업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채기업은 채현국 선생님이 4살이었던 1938년 '대구 경찰서 폭파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상하이로 도망을 갔다. 상하이에서 아버지 채기업은 타고난 사업가 기질을 발휘하여 여러 사업을 벌여 돈을 많이 벌었다. 하지만 국내에 남은 세 모자의 삶은 비참했다. 다행히 어머니의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어렵사리 번 돈으로 집안은 그나마 사람 사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아버지 채기업은 일제 해방 이후 1946년 귀국을 하게 되었으나 상하이에서 번 많은 재산은 중국군에게 빼앗겼다.
귀국 후 아버지는 가족이 살고 있던 대구에서 사업을 시작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채현국 형은 대구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좌익에 빠졌고 자칫하면 죽게 될 위기에 처하자 아버지는 장남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다. 장남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들어 갔으나 그곳에서 다시 좌익활동을 시작했고 그런 와중에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반발했다. 이에 많은 대학들도 피난길에 올랐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지방에 피난길에 올랐던 대학들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채현국 형은 당시 서울대 상과대학 4학년이었는데 휴전협정이 체결된 7월 27일 "이제는 영구분단이다. 잘살아라"라는 말을 남기고 돌연 자살을 하고 말았다. 아버지 채기업은 장남의 자살에 충격을 받았는지 서울에서 하던 연탄공장을 버리고 강원도에 가서 탄광사업에 손을 댔다.
채현국 선생님은 1956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1960년에 졸업하고 1961년 10월 중앙방송국(KBS의 전신) 공채 1기 연출직에 입사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로 방송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에 의해 박정희 정권을 미화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라는 지시를 듣자 3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둔다. 직장을 그만둔 뒤 찾아간 곳은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던 강원도 삼척의 흥국탄광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 회사는 부도를 맞기 일보 직전이었고 채현국 선생님은 백방으로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때 도움을 준 분이 백낙청(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모친이었다. 훗날 백낙청이 발행했던 <창작과 비평>의 운영비가 바닥날 때 마다 채현국 선생님은 조금의 자금을 보태며 은공을 갚았다.
이렇게 해서 위기를 넘긴 흥국탄광은 1973년 정리할 때까지 10여 년간 전성기를 누렸다. 사업이 한창 번성할 때는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 2위를 기록할 정도로 거부 소리를 듣기도 했다. 1973년 직원들에게 재산을 모두 분배하고 사업을 정리했다. 돈 버는 재미에 빠져 돈 버는 것이 권력과 명예, 신앙이 되어 버리기 전에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뒤에서는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때 핍박받는 민주화 인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활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988년부터 효암학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해 효암고등학교와 개운중학교를 뒤에서 돌보며 교육자의 삶을 살고 있다. 효암은 아버지 채기업의 호이다. 이사장으로서의 급여는 받지 않고 있다. 자신을 내세우기 싫어하는 성격 하는 성격이지만 정체되고 부패하는 것을 경계하며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목소리를 높인다. 시민단체의 요청으로 여러 강연에 참석하여 역사, 정치, 예술, 철학까지 아우르며 명강의를 펼쳤고 강연을 들은 사람들은 그를 두고 '거리의 철학자'로 불렀다.
"잘 사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 되기 쉬워."
드라마 <나의 아저씨> 5화에서 달을 바라보며 할머니가 박동훈 부장(이선균)이 좋은 사람 같다고 하자 소녀 가장 이지안(이지은, 아이유)이 한 말이다. 극중 대사처럼 잘 사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쉬우면 좋겠지만 현실 사회에서는 흔치 않아 보인다. 채현국 선생님처럼 잘 사셨던 분이 행동으로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는 지금 한국 사회를 보면 알 수 있다.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선생님이 지난 4월 2일 별세하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채현국 선생님에 대한 책은 <쓴맛이 사는 맛>, <풍운아 채현국> 두권이 있다. 채현국 선생님의 철학과 인생이 궁금하신 분들은 읽어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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