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46대 대통령 (지금 현재는 당선인) 조 바이든의 전체 이름은 조셉 로비네트 바이든 주니어이다, 1942년 11월 20일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트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나이 77세로 대통령 취임 시 역대 최고령 대통령이 된다.
집안은 아일랜드계 미국인 계통이며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이었다. 아버지 조셉 바이든 시니어(1915 ~ 2002)와 어머니 캐서린 바이든(1917 ~ 2010)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도시공학자였던 그의 증조부 조지 T. 바이든이 부를 쌓아 펜실베이니아주 상원의원까지 지냈고, 이후에도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바이든이 태어났을 무렵에는 아버지 조셉 바이든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으며, 한동안 외할머니 집에서 더부살이를 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이어갔다. 1950년대에 불황이 오자 조셉 바이든은 일자리를 찾아 고향 펜실베이니아 주를 떠나 델라웨어 주 월밍턴으로 이주했고, 여기서 간신히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게 되면서 형편이 나아졌다고 한다.
조 바이든은 델라웨어 주 클레이몬트에 있는 가톨릭계 사립학교인 아키메어 아카데미(Archmere Academy)로 진학했다. 재학하면서 풋볼을 즐겨했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농성 운동에도 참여했다. 1961년 델라웨어 대학교에 진학했으며 전공은 역사학과 정치학으로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아 688명 중 506등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벼락치기에 재능이 있었는지 시라큐스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했다. 1966년에 로스쿨 재학 중에 네일리어 헌터(Neilia Hunter)를 만나 결혼하고 2남 1녀를 두었다. 대학 및 대학원 재학 사유로 5차례 입영연기를 한 후 1968년 4월 5일에 받은 선병검사에서 1-Y 등급을 받고 베트남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았는데 천식 때문이었다.
1969년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고 힘있는 사람의 편에 서는 것에 자괴감을 느껴 국선변호인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선변호인 활동만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지역 로펌에 재취업하게 되는데, 이곳을 통해 민주당 내 개혁을 다루는 포럼에 참여하게 된 바이든은 이 모임에서 델라웨어 뉴캐슬 카운티 출마 권유를 받게 된다. 당시 뉴캐슬 카운티는 공화당 강세 지역이라 민주당에서는 후보로 나서려 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는데, 바이든은 그런 지역에 출마해 2천 표 차이로 1970년 11월 뉴캐슬 카운티의 카운티 의회 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1972년에 민주당으로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당시 해당 선거구의 상원의원은 J. 보그스(J. Caleb Boggs)로 델라웨어 지역에서만 3선을 지낸 현역 베테랑 의원이었다. 정계 은퇴를 고려하던 그의 후계를 두고 공화당에 분열이 생겼고 당시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은 한 번만 더 출마하라고 보그스를 설득했다. 당시 델라웨어 민주당 내에서는 그 누구도 경쟁 후보인 보그스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보로 나가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때 바이든은 젊은 나이라는 이유로 떠밀리듯이 출마하게 되었다. 사실상 패전 처리 투수 역할이었던 갓 서른의 바이든은 그러나 3천 표 차로 보그스를 이기는 이변을 일으켰고 미국 역사상 다섯 번째로 어린 상원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18일에 크리스마스 쇼핑을 하러 차를 끌고 나간 가족들이 교차로에서 트레일러에 추돌되는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 닐리아와 장녀인 나오미가 사망했다. 두 아들은 크게 다쳐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고, 결국 그는 상원의원 취임 선서를 아들의 병실에서 하게 되었다.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바이든은 힘들게 얻은 상원의원직을 포기하려 했다. 실제 상원의원 선언식에서도 대놓고 "만약 제가 좋은 아버지이자 좋은 상원의원이 될 수 없으면 주지사 당선자인 트리비트 씨에게 연락을 하겠습니다. 좋은 상원의원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지만, 좋은 아버지는 찾을 수 없거든요."라고 발언을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몰려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때 여동생 발레리가 교사직을 포기하고 조의 두 아들들을 자신이 돌볼 테니 의원직을 계속하도록 적극 설득했고, 결국 조는 여동생 발레리와 남동생 지미의 도움을 받아 상원의원직을 이어 나가게 된다.
바이든은 상원의원 생활을 하며 1977년에 영어 교사 질 제이콥스(Jill Tracy Jacobs, 1951-)와 결혼한다. 두 사람 다 재혼이었다. 계속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며 민주당에서 중진으로 경력을 쌓았는데 1988년에 목 통증이 심해져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뇌동맥류가 파열된 탓에 그는 사경을 헤맸지만 7개월 만에 재활해 복귀했다.
1988년에는 당시 역대 2번째로 젊은 나이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젊은 이미지로 베이비 붐 세대의 지지를 받으며 유력 후보 중 한 명이었지만 영국 노동당 당수인 닐 키녹의 연설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고 결국 경선을 도중 포기했다. 이후 2008년까지 36년 동안 델라웨어의 연방 상원의원으로 지냈다. 주로 외교 분야에서 활동했고 코소보 문제에 특히 많이 관여했다. 코소보 문제 당시에 미군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공화당 의원인 존 매케인과 결의서를 통과시키기도 했다. 1991년 걸프전 당시에는 반대표를 던졌지만 2003년 조지 워커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할 때는 용인했고, 대신 사담 후세인의 제거에는 반대했다.
2008년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조기에 탈락할 조짐이 보였고 결국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5위로 참패한 후 경선 중단을 선언했다. 하지만 중도 성향 백인 표를 끌어들이기 위해 버락 오바마는 그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바이든은 이를 수락했다. 2009년,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고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탈출을 위해 발의한 미국 경기 회복 및 재투자 법이 상원에서 초당적 협력을 통해 통과할 수 있도록 부통령 겸 상원 의장으로 공화당 의원 3명을 포섭하는 데 성공하면서 중도적 협상가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2012년 오바마는 다시 조 바이든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폴 라이언과의 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특유의 넉살과 경험으로 의외로 매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본인도 재선에 성공하였다.
2016년 대선에는 출마하지 않았고 2020년 민주단 대선후보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를 누르고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 2020 미국대선에서 우편투표의 압도적인 승리로 샤이 트럼프 표를 누르고 대통령 당선인이 되었고 2021년 1월 20일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임기를 시작하게 된다.
# 본 글은 나무위키 자료를 요약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알려 주다 (정보 소개) > 인물을 알리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1) : 하이디, 코난 그리고 나우시카 (0) | 2020.12.02 |
---|---|
일본의 봉준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대하여 (0) | 2020.11.30 |
하늘의 부름을 받은 '축구의 신' 마라도나 (0) | 2020.11.26 |
금태섭 : 앞으로의 길은 국민의힘당? 국민의당? 시사평론가? (0) | 2020.10.21 |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며 (0) | 2020.05.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