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시어터에 입문하면서 브라운관 TV와 저렴한 앰프, 5.1 스피커를 갖고 있다가 2004년에 좀 넓은 곳으로 이사 가면서 거실에 프로젝터와 100인치 스크린을 설치했다. 그 때가 딸래미가 4살 즈음이었는데 '이웃집 토토로' DVD를 100인치 스크린으로 처음 함께 봤다. 딸래미가 커 가면서 10여 번을 함께 같이 본 것 같다. '이웃집 토토로'는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으로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작품이었다. 그림체가 예전에 많이 본 듯 했는데 내가 어렸을 때 본 '미래소년 코난'도 그의 작품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딸래미를 핑계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등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 즉 지브리 스튜디오에 제작한 DVD를 사모으기 시작했다. 딸의 어린시절을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과 함께 보내게 해 준 미야자기 하야오 감독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1941년 1월 5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소학생 시절 체격도 작고 몸이 약해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고 대신 방안에 틀어박혀 그림 그리기와 독서에 열중했다. 1953년 중학교 입학하였고 중학교에 근무하던 프랑스 유학파 미술 선생님에게서 뎃생의 기초부터 개인 교습을 받았다. 1956년 고등학교 입학하고 만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토에이 동화의 《백사전》(1958)을 보고 여주인공에게 심쿵하고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디즈니 작품이나 미국 애니메이션은 많이 봤지만 애니메이션 업계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이 작품이다. 대학은 미대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가쿠슈인 대학 정경학부(정치경제학)로 진학했다. 대학 재학 기간 당시 일본은 한창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절이었으나, 가쿠슈인은 대표적 부르주아 교육기관(귀족학교)이라 학생운동의 무풍지대였다. 미야자키도 처음에는 철없는 학생이었지만, 1960년 안보투쟁에는 주간지 <아사히 클럽> 6월 임시증간호에 실린 사진(경찰이 대학생을 유혈진압)을 보고 충격을 받고 뒤늦게 데모에 참여했다. 대학 재학 시 학교에 만화 서클이 없었기에(당시 만화의 사회적 지위는 낮아서 대학에 만화 동아리라는 것이 생긴 것은 한참 훗날이다)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아동문화 연구회(児童文化研究会)에 소속한다. 만화가와 애니메이터라는 진로 선택의 갈림길에서 극화의 세계와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 어디가 표현방법으로 뛰어날까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애니메이션이 뛰어나다고 결론을 내린다.
1963년 대학을 졸업하고 토에이 동화에 정기채용으로 입사했다. 토에이 동화의 '걸리버의 우주여행(1965)',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 '장화신은 고양이(1969)' 등 여러 작품에서 일을 했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1971년 A프로덕션(현재의 신에이 동화)에 자리를 옮겨 TV 시리즈 '루팡 3세'의 연출을 맡았으며 극장용 단편만화영화 '판다 아기 판다(1972)'를 만들었다. 1973년 TV 시리즈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제작하여 평균 시청률 20%가 넘는 고시청률을 얻고 차기작 '엄마찾아 삼만리'를 만들었다. 1977년 일본에서는 우주전함 야마토의 극장판 편집 영화의 히트와 스타 워즈의 영향으로 SF 붐이 일었다.
이런 환경에 NHK 기획으로 '미래소년 코난'이 제작되었고 지금도 회자되는 고전의 명작이 되었다. 그 후 세계명작극장 시리즈 '빨강머리 앤'에 참가하고 처음으로 극장용 영화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의 감독으로 데뷔였다. 하지만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흥행 참패는 39살의 미야자키 하야오에세 정신적 데미지가 컸고 이후 작품에 대해서 회사와 의견이 맞지 않아 퇴사하고 프리랜서가 된다.
프리랜서가 된 후 여러가지 영화 기획을 하였으나 받아 주는 곳은 없었다. 미야자키는 영상화는 염두에 두지 않고 평소 자신의 철학과 취향을 살린, 만화라는 표현 매체에 맞는 작품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일본 애니메이션 잡지 ‘아니메쥬’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인기를 얻었고 드디어 동명의 극장용 만화영화가 1984년 3월 11일 방영되었다. 관객 동원수는 91만 5천명이 넘었고 그 해 아니메 그랑프리, 일본 아니메 대상을 탔고 1985년 TV 방영이 되면서 호평을 받아 비디오 판매와 렌탈 사업으로 높은 매출을 기록했다. 이에 돈이 많아진 미야자키는 나우시카를 만들 때 프로듀서를 맡아 준 타카하타 이사오의 은혜를 갚기 위해 타카하타의 다큐멘터리의 프로듀서가 되어 투자했으나 본인의 자택까지 저당까지 잡혀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만화영화 한편을 제작하는데 그 만화영화가 바로 '천공의 성 라퓨타'이고 제작사가 <스튜디오 지브리>이다.
(2)편에 계속...
주요 출처 : 나무위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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